해당 인터뷰는 2020년 사내 소식지에서 인터뷰이로 지목되어 진행한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레진엔터테인먼트에 입사하기 전에는 웹툰 작가였어요. <인력거>라는 여행기 웹툰으로 데뷔했는데요. 당시에는 여행기를 만화로 그리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반응이 좋아서 전자책으로도 출판했고, 경기도 도서관이 선정한 올해의 좋은 도서 10선에 선정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활동할 때만 하더라도 만화를 그리며 생계를 이어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1달에 100만 원을 받으며 연재했는데, 생활비가 부족해서 주말에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아르바이트해야 했어요. 그러다 보니 작품에 집중하기 힘들었고, 돈도 모이지 않아서 이럴 바에는 취직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는데, 만화가 너무 좋아서 기왕이면 만화 회사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 레진엔터테인먼트 일본만화제작팀의 공고를 봤습니다. 일본어 전공에 작가 이력도 있고 여러모로 저와 잘 맞을 것 같아서 입사를 결심했습니다.
콘텐츠 사업 그룹의 웹툰관리팀에서 에디터를 맡고 있습니다. 주 업무는 일본 만화를 직수입하여 한국 독자의 정서에 맞게 로컬라이징하고, 레진코믹스 KR 사이트에 서비스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전체 프로세스의 절반 정도를 맡았는데, 조직변경 후 책임 편집자가 된 후로는 모든 과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신작의 판권을 계약할지 검토하고, 라인업을 짜게 되었는데, 들여온 작품의 실적이 잘 나와야 하므로 권한이 커진 만큼 부담감도 늘어났습니다. 이외에도 계약한 작품의 인쇄 및 출판 업무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장르로는 BL, 남성향 성인작품, 백합 작품을 주로 들여오고, 레진이라는 브랜드와 잘 어울리는 작품인지도 확인합니다. 레진이 추구하는 이미지와 독자성향을 고려해야 하거든요. 때문에 한 철만 장사하고 말 것이 아니라 한 편의 만화로서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편이에요. 일단 작화 퀄리티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해요. 독자가 원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그림이 예쁠수록 쾌감이 더욱 올라간다고 생각하거든요. 거기에 기승전결이 갖춰져 있어 감정이 고조되는 구간이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다음 편을 결제해서 보고 싶은 작품을 찾는 게 중요해요. 수입할 작품을 검토할 때 팀원끼리 점수 매겨서 공유하는데요. 100점 만점에 70점이면 괜찮은 작품인데, 저희는 팀원들의 평균 점수가 80점 이상이 되어야 계약을 진행합니다. 4월부터 제가 뽑은 라인업이 서비스되기 시작하는데 성과가 잘 나오면 좋겠네요.
출판은 웹툰을 편집하면서 익혔던 지식이 통하지 않는 분야 같아요. 완전히 다른 세계라고 할까요. 과정도 복잡하고 생소한 용어도 많습니다. 종이책이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치는 만큼 신경 써야 할 부분도 많아요. 종이의 재질부터 커버 디자인, 서점에서 진행할 이벤트까지 직접 기획합니다. 무엇보다 웹툰은 오타와 같이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면 즉시 수정할 수 있는데, 종이책은 출판되면 끝이기 때문에 훨씬 꼼꼼한 교정이 필요해요. 데이터를 거래하는 인쇄소에 넘기면, 직접 인쇄소를 방문해서 가제본을 보고 색이나 모양 등이 잘 나왔는지 확인합니다. 인쇄 과정에서 잉크의 비율이나 농도에 따라 색이 달라지기 때문에 변수가 많거든요. 가제본에 문제가 없으면 종이책으로 만들어 일산에 있는 회사 도서 창고에 보관하는데요. 창고 공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폐기할 책과 더 찍어낼 책의 목록을 만들어 관리하고 있습니다. 출판 업무는 손이 많이 가는 데에 비해 리소스가 많이 투여되는 업무는 아닌데요. 사업 성과를 올리기보다는 독자와 팬을 위해 진행하고 있습니다.
작가였을 때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어 행복했어요. 창작자로서의 가장 큰 보람은 내 창작물을 누군가 사주고, 피드백을 준다는 것입니다. 가수가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면 무대의 맛을 잊지 못한다는 것처럼 만화가도 작품을 공개했을 때 악플이든 선플이든 반응이 있고, 응원하는 사람이 1명이라도 있으면 순도 높은 쾌감을 느낍니다. 시간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점은 장점이자 단점인 것 같아요. 자유로운 만큼 엄격한 시간 관리가 어렵거든요. 저 같은 경우에는 연재 당시 일주일의 반 정도는 흘려보내고 급하게 콘티를 짜기 시작했는데요.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것 같아서 일정을 미루지만, 결국은 예전에 넣어두었던 아이디어를 꺼내 급하게 마감에 맞추게 되더라고요.
직장인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월급이 나온다는 점이죠. 시간도 빨리 가고요. 작가 생활을 할 때는 1년이 정말 안 갔는데, 지금은 정신 차려보니 입사한 지 2년이 넘었어요. 지루할 겨를이 없습니다. 제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해서 팀원들과 같이 일하는 것도 장점이고요. 아, 그리고 어머니가 좋아하십니다. 작가 시절에는 일을 하고 있지만, 부모님 눈에는 그렇지 않아 보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취방을 얻어 나갔습니다. 레진에 다닌 후로는 다시 사이가 좋아져서 함께 살고 있어요. 고기반찬도 해주십니다. 단점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고, 출퇴근 시간이 길다는 정도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책임감의 무게가 다릅니다. 예전에는 내 한 몸만 책임지면 됐는데, 지금은 실수하면 회사가 손해를 볼 수 있어서 일을 하면서 더욱 조심하게 됩니다. 작년에 단행본의 가제본을 확인하고 인쇄를 돌렸는데, 나중에 받아보니 중요한 컷에 여자 주인공 얼굴에 잉크가 튀어서 왕점이 생겼더라고요. 분명 확인을 여러 번 했는데도 잡아내지 못해서 결국 다 폐기했어요. 그때부터 더 정신 차려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회사 생활이 잘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천성이 게으르고 자율주도적이지 못해서 명령을 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특히 제 사수께서 채찍으로 잘 이끌어주고 계십니다.(농담입니다)
삶의 두 번째 챕터 같아요. 예전에는 일은 물론이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느리고 여유로운, 크리에이티브한 삶을 추구했고, 친구들도 예술가가 대부분이었어요. 마치 현실에서 5츠 정도 떨어진 느낌이요. 지금은 회사라는 조직에 들어와 스케줄에 맞춰 체계적으로 업무를 하는 월급쟁이가 됐습니다. 2년째 다니고 있는 걸 보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팀원들이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줬어요.
작가였던 시절, 백수였던 때, 그 외에도 허송세월을 보낸 모든 시간이 쌓여서 지금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이제는 열심히 일해야 할 때이고, 그때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살면서 후회가 적은 쪽을 선택하려 해요.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 하는 쪽을 택했을 때 후회가 적었던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고 감당이 안되면 주변 의견을 들어보게 되는데, 이미 그 시점부터 마음은 기울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벽과 주변의 만류로 마음을 접어서 후회는 모습을 종종 봤어요. 그 정도까지 고민했으면 하는 게 맞고 그래야 미련이 없습니다. 정신건강에도 좋고요.